190428 부활의 삶은 죽음을 경험하는 삶이다.


이제 완연한 봄이 되었다. 봄의 향연을 벌이려는 듯 나무들은 형형색색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연푸픈 잎을 내면서 앙상한 가지들은 어느 사이에 아름다운 잎들로 옷을 입었다. 죽은 듯 서 있던 나무들이 죽음보다 더 큰 생명의 힘을 보란 듯이 발휘하고 있다. 봄은 그래서 좋은가 보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생명의 활력도 겨울의 싸늘한 바람과 얼어붙는 추위를 이겨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죽음과 같은 어려움을 이내면서 또 다른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은 죽음에까지 내려가심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로서 이제까지 사망이 지배하던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 더 이상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은 단지 예수님만이 살아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진 모든 그의 백성들까지 함께 일어나게 하셨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아버지 집에 거할 수 있게 하셨다. 이제 죽음은 망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집으로 가는 문에 불과하게 되었다. 부활의 새 생명이 믿는 자들의 생명이 되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새 생명의 삶은 날마다 사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죽는 삶임을 고백하였다. 그는 부활의 주를 만났고 주님을 통한 영원한 생명으로 살 것인데, 왜 날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한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부활의 주님과 연합한 자만이 진정한 죽음을 날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비록 우리 영은 주님의 생명을 받았어도 아직 죽을 육신의 몸을 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지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우리 마음을 거슬리면서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욕망이 우리를 이끌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속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날마다 살려 하지만, 우리 지체는 날마다 세상을 향하여 가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이 두 욕망이 싸우게 된다. 이것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죽음을 경험함이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내려놓을 때에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