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상실한 수감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허무주의자
2014.04.20 17:08
희망을 상실한 수감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허무주의자
수감자의 생존의 소망을 계속 붙들게 한 것은 바로 미래였다. 자신을 위한 미래를 볼 수 없는 사람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옷입기를 거부한 특유의 행동은 구타 욕설 우위협 태형 등 어느 것도 쓸모가 없었다. 생존을 위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희망을 상실한 수감자는 생존을 위한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존엄성의 모든 자취를 제거당한 자는 페기물로 전략한다. 동일한 이유로 포스트모더니즘 서구 사회에서 의미를 붙잡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도 그러하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며 살지만 의미가 없는 세계의 미래는 수용소에서 포기해 버린 수감자의 미래만큼이나 무능하다. 차이가 있다면 포스트모던주의자는 내면의 부식을 상쇄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고가의 명품, 금액의 돈, 오락과 휴양, 성과 마약 등은 대리적인 의미나 순간적인 기분전환, 또는 무감각 상태를 만드는 수단이 된다. 대리적인 의미와 기분전환은 내면의 공백고 자아의 고갈을 은폐함으로써 자아의 아픔이 망각될 수 있게 만든다. 현대의 소비는 쇼핑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긍극적인 의미의 대용품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멸적인 전략이다. 소비형태의 선택은 우발적이고 삶은 단편화됐다. 예전에는 삶에 중심이 있었고 절대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삶에 중심도 삶을 지배하는 절대 권위도 없다. 단지 작은 부분을 지배하는 권위자나 전문가만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허무주의다.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을 피하기 위해 은밀하고 파악하기 어렵고 피상적이고 교활한 전략을 사용하며 공백을 극복하는 스스로의 능력에 낙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공허감으로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농담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것을 구매하는 편이 더 낫다.(웰스의 '위대하신 그리스도' 5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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