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에 물든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증상


20 세기의 주도적인 인간형은 심리학적 인간이다. 과거 행복은 추구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의 부산물로 여겼고 자아는 포기할 때에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도덕과 행복에 연결점이 희미해졌다. 개성이 인간 본성과 무관하다고 간주한다. 이제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선한 품성이 아니라 좋은 느낌이다. 자아 운동은 현대인의 집단적인 불행과 불안정의 증거일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 사람은 자아를 추구하게 된다. 복음주의 변모는 19 세기초부터 일어난 부흥운동으로 박차를 가해서 칼빈주의적 경향에서 전형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경향으로 신학의 축이 바꾸어 놓았다. 미국인이 내적인 경험을 추구한다면 복음주의자는 신실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문화적 호소력을 통해 종교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제 복음주의자는 신앙의 확신을 성경 가르침의 객관적 진실성이란 맥락에서가 아니라 주관적 체험의 효과라는 맥락에서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간증은 그래서 타자 지향적 개인의 굶주림에 호응하는 내면적 체험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객관적 진리의 가치는 희생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성경 말씀을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대한 체험을 간직하고 있다.

신약의 증거는 기독교 신앙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증거였고 그 진리는 그들이 겪었던 사실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증거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증거한다. 믿음의 타당성에 있어서 그 말의 사실성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찬송가도 체험 중심적 초점을 반영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현대의 소비문화와 그 문화에 따라오는 사고 방식을 받아들었다.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현대인은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자아이다" 로 바꾸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나는 종교적으로 느낀다. 고로 나는 하나의 자아이다. 종교적 자아 추구는 종교적으로 좋은 느낌 좋은 감정에 대한 추구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에 문제는 공허하고 자기도취에 빠졌고 술과 마약에 방탕한 상태에서도 좋은 느낌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 매료가 분파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 상도 바꾸었다. 복음주의 목회자는 경영 사장, 최고 경영자이며 강단에 선 목사는 좋은 관계와 따스한 감정을 일깨워 주는 심리학자다.(웰스의 신학실종 4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