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심리학화가 복음주의 교회에 미친 영향 


해리 에머슨 포스터는 자유주의 주창자이며 자아론에 대해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인간론은 개인의 인격 안에 하나님이 내재하신다는 생각과 인간 본성은 완전하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그는 열정적으로 인간의 잠재력을 언급했다. 이는 19 세기의 미국의 자신감을 표출한 것이고 부상하고 있던 마음의 습관에 보조를 맞춘 것으로 단지 그 성향을 신학적으로 명료화한 것뿐이었다. 이 사상이 노먼 빈센트 필에게로, 다시 로버트 슐러에게로 옮겨갔다. 포스딕의 참사람에 대한 추구와 복음주의의 심리학적 온전함의 추구는 꼭 평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여러 위험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

1)삶의 심리화는 복음주의 정체성의 신경을 절단하고 있다. 자아 운동의 공통적인 전제는 인간 본성의 완전함에 있다. 이들 이론가들이 다 인본주의자들이다. 복음의 핵심은 자아는 왜곡되어 있고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 어그러진 관계에 있고 속임과 합리화로 가득차 있고 무법하며 반역적이기에 죽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무가치한 것을 표출함으로써가 아니라 억제함으로써 강해진다. 이 억제는 비합리적이며 무의식적인 메카니즘인 억압이 아니며 도덕적 관심과 그리스도의 소유되었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의식저기며 합리적인 행위이다.

도덕심이나 도덕적 기질이 손실되었는 상황에서 삶의 심리화는 자아의 공허함, 자아의 허무에 대한 반영이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신세계는 텔레비전의 이미지 자아 이미지 정치적 이미지 광고 이미지등 자아 이미지로 구성되어진 세계이다. 심리학적 인간은 문화적 유형으로서 최신작이다. 새로운 인종은 영구적인 것을 새로운 경험으로 바꾸고 진리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이미지 맥락에서 생각한다. 신념보다는 상황의 나침반에 따라 움직인다. 이런 심리학적 인간의 배후에는 자아 제거, 존재의 공허가 자리잡고 있다. 풍요의 경험은 내면의 실재를 지탱하는데 실패하였고 도덕적 나침반을 왜곡시켰다. 금욕주의나 자기 부인은 새로운 비도덕이 되었고 방종과 방탕이 새로운 복음이 되었다. 이것이 심리학이다. “건강과 부요의 복음”은 심리학적이고 문화적인 부패에 성령이 가세하고 있다.(오순절주의자) 도덕적 자아의 기능과 도덕적 힘을 지닌 신학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깊은 관계가 있다. 신학적 능력이 붕괴되는 것은 도덕적 기능을 상실케 한다.

2)삶의 심리화는 생각하는 의욕과 능력을 침식시키고 있다. 심리학화 과정은 실재에 대한 접근을 객관적인 사상보다는 주관적 체험과 동일시한다. 진리에 대한 신념의 붕괴와 자아에 경청하는 습관이 합해져 학문 세계에 필요로 하는 것을 파괴했다.

복음주의 교회에 끼친 영향은 교회의 관심이 외부에서 내면으로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정태적인 것” 대신에 “즉각적인 것”을, “있음” 대신에 “되어감”을, “참된 것” 대신에 “흥분되는 것”을 선택한다. 사실은 현대화된 문명의 산물에 불과한 변화를 성령이 주도하였다고 말함으로 분별력이 사라졌다.

진지한 사고는 생존 전략에서 필요가 없다고 한다. 신앙의 인지적인 측면은 철학에서 신앙의 심리학적 의미는 자아 발견이라는 도구에서 탐구하였다. 이는 다양성을 허용한 것이다. 이로서 자아의 자궁에서 태어난 기독교 신앙은 역사상의 기독교 신앙과 너무 다르다. 자아는 거대한 기독교 지리를 담아내게는 너무 작다. 자아가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제약할 때, 선과 악은 행복감과 불행감으로 전락하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위치는 사적인 의식 영역으로 전략하며,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속행위는 개인 구원의 체험에 맞추어지고,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한 필요한 것으로 축소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직관으로 대체되고, 확신은 미미한 의견으로 사라져 버린다. 의에 대한 성경적 관심은 행복 추구로, 거룩함에 대한 관심은 자아 통합성에 대한 추구로, 진리에 대한 추구는 감정에 대한 추구로, 윤리에 대한 추구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좋은 감정에 대한 추구로 대체되고 있다. 세계는 개인적 상황의 범위 안으로 축소되며, 신앙 공동체는 개인적인 주변 친구로 줄어든다. 남은 것은 자아 뿐이다. 남은 것은 시시하지만 파괴된 것은 크다. 신앙의 심리학화는 기독교인의 생각과 지성을 파괴하였다. 생각의 부식은 신학 함의 가능성도 침식되었다. 성경적 신앙은 진리에 대한 것이며 이것은 성경에 있는 언어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행하신 일을 기술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 경험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진리가 주관적이 된다) 자아 내면에서 실재를 구성할 수 있다(이성보다 직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재 넘은 소리이다. 이는 이방 종교의 모습이다. 선지자들의 분석의 전제는 도덕적 질서의 객관성과 창조 세계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현존이었다. 이제 선지자들이 진리의 객관성을 확신하였듯이 우리도 확신할 때에 선지자적인 사고를 회복할 수 있다.

3)삶의 심리학화는 신학이 감당하고 있는 일을 무력화한다. 그 일은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아 운동은 사회에서의 의미 있는 역할을 거부당한 세대에서 등장했다. 현대 사회는 공적인 영역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고 사적인 영역에서 찾게 한다. 공적인 구조는 너무나 거대하고 다양하여 개인적인 필요에 맞출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은 사적인 공간이다. 자아 만족은 문화마비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제 신앙은 하나의 존재 방식 중 하나 체험하는 여러 방식 중에 하나로 퇴색되었다. 복음주의 신앙에서 공적인 신학을 세울 수 있는 재료 즉 진리의 객관성에 대한 확신이 더 이상 없다.

더 나아가서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공동체의 삶, 지역 사회의 삶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만한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봉사가 얼마나 유지될 지는 의문이 된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류가 해방되어 모든 영광 가운데 계시는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진리의 찬란한 확신함에 사로잡힐 것이라는 강력한 비전은 이제 죽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할 비전이다)

자아로 몰려갔고 이제 자아가 자아 자체의 경건을 주도하고 충고하고 있다. 개인주의가 이제 우리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웰스의 신학실종 4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