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1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갖게 되는 율법의 의가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자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다 지키려고 노력을 다 해도 결국 하나님의 율법의 저울에는 다 미달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이 그 율법으로 사망에 이를 자임을 깨달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를 얻게 되는 다른 길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이다. 이것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시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가지게 된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 얻게 된 의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윗의 시에서 인용하고 있다.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7-8) 이것은 칭의라 부른다. 주께서 불의한 자를 그를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의이다.

그러면 여기 의롭다 함을 받는 의는 어떤 자에게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권능을 부여받으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행할 수 있기에 하나님 앞에 의를 가지게 된다고 칭의를 정의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도 실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에 의롭다함을 받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다윗이 말한 것은 오히려 불법을 행한 자 죄 아래 있는 자가 사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인용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함을 하나님 앞에 선언을 받는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아직까지 죄 아래 있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은혜의 구조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특히 루터는 의인된 죄인이라 칭하였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는 단지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 아니고 실재 구원의 능력이다. 불법한 자가 그리스도의 의를 이식받은 것이다. 우리가 찬양하고 감사하며 주를 위해 살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