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409 십계명 강의 첫 번째

2014.04.13 18:22

이상문목사 조회 수:4453

십계명 강의 첫 번째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서론 : 하나님과 이방 신과 다른 점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광신주의자는 아닙니다. 교회에 간 기억은 아물하지만 늘 제 삶을 이끌고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1)청교도가 지닌 공동체적이고 고백적인 신앙과 현대 종교관이 지닌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적 다양성을 대조한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95%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은 성경 계시의 하나님 곧 인간을 초월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 속에 의무감과 도덕적 무가치성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무감을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2)사도 바울이 아덴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복음.(행17:16-21)

하늘과 땅의 주인이심 :창조주와 통치자, 심판자이신 주권자이시다.

예 : 느부갓네살의 교만을 정신병으로 치셨고 들짐승처럼 살게 하시다가 온전한 정신이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단4:34-35,37)

3)이방 신앙에서 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선한 삶을 위한 도덕적 모범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자기행복과 힘과 계획의 성공 여부를 피조물에 의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이 무엇(희생제물, 주술의식 등)을 제공하면 그것이 신을 감동시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이 반응하게 만든다.

4)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다(행11:35-36) 하나님은 우리와 상호 협조의 차원이라기보다 통치자와 피치자의 차원이다.


1.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전 인류의 반역과 기만의 핵심에 놓여 있는 죄”

1)가장 오래된 고백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2)이방사람들의 신개념

농업과 연회와 정치와 사랑과 전쟁의 신이 있으며 이교도의 삶은 이런 비인격인적인 힘의 통제를 받았다. 종교는 인간의 다른 활동처럼 하나의 분리된 삶의 영역에 불과하였다. 유일한 주권자 하나님 신앙과 극명한 대조가 된다.

나일강 신(하피신)은 나일 강의 범람을 주관한다. 나일 강을 피로 변하게 하심으로 나일강을 다스리는 분이 이스라엘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심.

3)현대생활을 사로잡는 신제품의 존재는 우리의 지적, 정서적, 영적, 도덕적 발전에서 보여주는 훨씬 심각한 어리석음과 미숙함을 은폐한다. 물질적 번영과 과학적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서 미신과 어리석음에 빠지는 퇴행적이고 미숙한 이교도가 아니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뉴에이지 운동, 대지숭배와 여신숭배의 부활이 주요 대학에서 자행되고 있다.

4)실제 시공간의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주권자 하나님 개념에서 우리 삶의 독립된 영역을 관장하면서 각 영역에서 성공과 행복을 보장하는 영역 신으로 변질되는 추이다. 하나님은 종교라는 영역을 관장하지만, 삶 자체는 경력과 소유와 탐욕과 자존감과 가정과 친구와 유희와 유행이라는 우상의 지배를 받는다.

5)우리 자신의 삶을 여러 부분으로 분할할 때 재능은 짐스럽게 변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의 징조는 우상으로 자리잡는다.

과학이 그 자체의 본질과 달리 하나님이 되고자 시도할 때 그 숭고함과 합리성은 미신적이고 불합리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자신의 취미나 흥미나 스포츠나 유희나 직업이나 대인관계나 먹을거리나 옷이나 승용차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향한 선물임을 상기시키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절제하는 마음으로 사용할 때 진정 이 선물들을 누리게 된다. 그 선물 자체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시선을 돌리도록 주어진 것이다. 현대인의 중독이라 부르는 것, 그 선물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우상이다. 선물은 기쁨과 희락의 원천이지만 우상은 구원이 아닌 파멸로 끝난다.


2.이 계명은 어떤 의미인가?

1)이 계명은 명령이자 약속이다.

“보라 나는 말로 이 세상을 창조하고 너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주권자 하나님이다. 내가 전능하므로 이 혼돈 속에서 너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다. 또한 너희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구원하기를 원하는데 내가 자비롭고 은혜롭기 때문이다”

(1)고양된 자아를 숭배의 중심에 두는 보편적 인간 성향을 버려야 한다. 우리 자신의 믿음과 확신과 소망을 믿는 것, 루터는 가장 위험한 우상숭배로 “행위의 의”라 불렀다.

(2)이 계명의 내포된 책임은 예찬과 신뢰와 탄원과 감사의 측면이다. 하나님을 예찬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그 통치가 의로우심을 고백하면서 자기 양심을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죄의 현실에서 우리 양심을 해방하는 일과 우리 구원의 중심을 온전히 하나님께 둘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에 호소할 때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감사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반응이다. 복음은 단지 명령이 아니라 감사를 위한 동기다.

2)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신뢰하면서 그것의 이름을 부르고 감사할 때, 이 계명을 위반한 것이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출세, 유희, 자신의 의지나 노력, 자기 결단과 자기 헌신이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가? 하나님은 영원한 구속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는가?


3. 무엇이 우리의 우상인가?

1)돈과 섹스와 권력과 성공

2)베이컨의 네가지 우상 : 종족우상(민족주의), 동굴우상(미신), 시장우상(상업), 극장우상(유희) 여기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강박관념에서 우상숭배를 보게 된다. 민족주의 운동, 미신적 축사, 마케팅 방식, 엔터테인먼트의 형태.

3)현대 우상의 정의 “우리 일정과 우리 목표와 우리 민족과 우리 집단과 우리 운동과 무엇이든 우리와 관계된 것을 섬김으로써, 우리는 곧 자신을 숭배할 수 있다”

(1)믿음을 믿는 믿음

믿음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어떤 능력이 아니다. 믿음 그 자체는 절대로 어떤 것을 할 수 없다. 믿음이 구원하고 치료하거나 복을 가져 올 수 있다면,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뉴에이지 신비주의자와 기복주의 설교자는 믿음에 신성을 부여하면서 우상숭배를 부추기고 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이나 사물을 믿는 믿음은 아무리 훌륭하게 보여도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나 결정에 대한 신념은 복음과 반대될 뿐아니라 다른 복음이다. 피조물이 ‘삶의 영역에서 주요 대상’으로 자리잡을수록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섬김을 받게 된다.(롬1:25)

(2)체험을 믿는 믿음

자신이 체험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주목하는 대신, 자기 체험을 표준으로 간주하면서 자신이 이미 내린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한다. 우리는 ‘옳은 것처럼 느끼고 옳은 것처럼 들리거나 올은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믿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를 우상시하는 일에도 주의하여야 한다. “나는 1968년 그 날 밤에 일어났던 회심하는 그 일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보다 체험이라는 우상을 믿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시의 개인 체험을 근거로 종교적 주장을 할 때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보좌를 침해하는 셈이다.

우리의 신앙은 신적 계시에 의존하는 것이지 인간의 견해에 의존하지 않으며, 개인 체험은 본질적으로 “예수님과의 개인관계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으로 주관적이고 상대주의 같은 것이다. 신앙의 대상(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다면 그와 같은 개인 신앙은 우상숭배다.

(3)사랑을 믿는 믿음

기독교 우상의 전형이 ‘사랑’이다. 다소 감상적인 성격을 띤다.

“현대 기독교가 직면한 불행은 전통 신학을 20세기 감상주의 신학으로 대체해 버린 사실이다. 감상주의 신학은 사랑의 하나님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변함없는 관심으로 좋은 시절을 누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상실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죄받는 것보다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운 상태로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우상을 참 신이라는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진 문제(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 가지신 문제(거룩성)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랑이라는 우상은 복음의 메시지와 목표를 혼동하게 하고 교회에서 권징이 시행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사랑과 일치가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보다 중요하게 여겨질 때마다 그 사랑과 일치는 우상이 되고 만다. 사랑이 진리와 성결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4)자아를 믿는 믿음

대중 문화에서 인생의 최고목표 “자아에 대한 사랑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로맨스의 서막이다”(쾌락주의자 오스카 와일드의 말)

“자아를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근본 의지이며 또한 근본의지여야 한다” (로버트 슐러)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가르치심.

딤후3:1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이것은 권유가 아니라 경고이다. 오늘날 물질주의와 성적 만족과 유행과 쾌락주의와 같은 많은 우상을 탄생시키고 복음을 값싸게 취급하게 만든 것은 자기사랑이다.

(5)행복을 믿는 믿음

미국민은 가장 낙천적인 국민이다. 그러니 행복은 미국인의 우상이다. 대중심리학은 현대인에게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것이 개인의 행복과 성취를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행복이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가 의뢰하던 대상과 인물은 결국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고 행복의 숭배는 결국 환멸과 탈진과 우울한 악몽으로 탈바꿈한다. 이것을 “쾌락의 역설”이라 부른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기쁨을 최고로 맛보았으며, 인간의 유약함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내맡기고 포기했던 때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자유를 발견한 때임을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주었다.

종교적인 상상력은 세속적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의 모조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 우상에 대한 동경과 신뢰와 호소와 감사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4.얼마나 많은 신이 존재하는가?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반론 1)제한적이다. 이 명령은 다양한 신이나 권력이나 숭배 대상이나 구원자가 존재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이라 하셨다.

2)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이교 신앙에서 종교는 인간의 번영과 행복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성경적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삶의 모든 관심사가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삼으셨다.

3)모든 이교 신앙은 이 명령이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라기보다는 독단적이며 객관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이 명령은 자신이 아닌 외부 대상에 관심을 쏟도록 요구한다. 이교 신앙은 “우리 안에 있는 신”, 우리 마음에 감추어진 “신성의 불꽃”에서 소망이나 구원이나 생명의 근원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것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5.보편구원론

1)기독교 신학을 선하다고 평가하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만큼 ‘선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한다. (간디?, 히틀러?)

2)영벌은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보다 이성을 신뢰하고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맞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곧 자신의 우상을 만들게 된다.

“이는 전통적 신학적 배타주의의 순결성을 경감시키고 사람들이 최종진리가 아니라 최종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헌터

3)기독교는 문화다원주의의 장애물이 아니다. 계5:9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신앙은 절대적 신뢰와 충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종교 다원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4)신앙주의와 다원주의의 결탁은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신념체계-각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간에-를 가져야 한다’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과 진리라면(요14:6~7) 기독교의 배타성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뿐 아니라 그분을 증언하는 가르침-신구약성경-으로까지 확대된다.

참고서적 : 마이클 호튼 ‘삶의 목적과 의미’ 2장


4월 십자가와 부활의 달 새사람의 생명의 기초로서 십자가와 부활

4/6                    엡5:8-14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삶의 대 명제)

4/13 종려주일 요19:4-15누가 왕이냐? 가이사, 예수님 (순종의 원리)

4/20 부활주일 고전15:20-28부활의 첫 열매 (새생명의 근거)

4/27                   요20:19-23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삶의 목적, 사명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