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역에서 나타낸 이미지


칭의는 다른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칭의와 화목(고후5:19), 칭의와 속죄(롬3:24), 칭의와 사탄의 패배(골2:14-15) 등이다. 바울에게 이 교리들은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영원한 행동을 이해하는 방편이다. 바울 사도의 회심에 대한 고백은 체험보다 신학적인 설명이다. 사도 회심이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를 라이트는 설명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이 말세에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그 일을 참되신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나사렛 예수를 위해 행하셨음”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방민족을 패퇴시키는 위대한 반전이 예수님에게 일어났다. 이렇게 오는 종말론적인 세상은 예수님이 이방 민족을 정복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과 사탄이 정복됨으로써 성립됐다. 대속적인 용어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뿐아니라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의 유익을 위해 죽으셨다는 생각만을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까닭은 예수님이 우리 자리에서 죄벌을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실제 우리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칭의 교리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대리 속죄가 깔려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는 일이 법체계가 용인할 수 있는 지 의문을 다는 자들이 있다. 죄의 전가라는 문제 옆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성의 수준에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동시에 사랑하시고, 의로운 동시에 자비로우시고, 구원의 하나님인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속죄 교리를 하나님의 이런 성품에서 두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죽음과 사탄을 상대로 행동하신다. 칭의 교리는 비인격적인 법률의 작용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다. 윤리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것인데 그 손상된 윤리법에 행동하실 때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진노의 짐을 짊어지시는 자신, 자신의 의로운 성품이 요구할 수밖에 없는 심판을 그리스도 인격에 부담시키시는 자신, 그 어떤 죄인도 줄 수 없는 것을 제공하시는 자신, 그 어떤 죄인도 견딜 수 없고 남아 있을 수 없는 형벌을 부담하시는 자신에게 그 결론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뼈를 통해 취하신 행동이지만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초월하는 의미도 있다. 그것이 역사에서 발생하였으나 그 실재는 역사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다. 십자가 처형은 역사적인 정황이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속죄가 이뤄졌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설립됐으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는 세상이 시공 속으로 관입됐다.

계몽주의의 특징은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아니라 실재를 이해할 때 자연주의적인 추론과 경험적인 증거만을 받아들이려고 고집하는 점이다. 검사될 수 없는 것, 분석될 수 없는 것, 비교 검토될 수 없는 것은 거부되었다. 이런 계몽주의를 깨뜨리는 포스터모더니즘은 이성보다 이미지, 상상력, 관계성, 소속감을 크게 중시한다. 오늘 영상 시대엔 이성의 언어보다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말의 중심적인 역할은 폐지되어야 하고 합리주의는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포스터모던주의자는 세상에서 삶의 공허함 및 의미와 영속적이고 고정된 가치 체계의 부재를 지적하였다. 이럼으로 기만적인 의미에 기대어 살던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들보다 사실상 훨씬 진리에 가깝게 다가왔다. 이 세상엔 소망이 없다는 것은 포스터모더니즘의 결론이지만 사도 바울이 이미 선언한 말이다. 서구 사회의 풍요로운 삶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드리워져 있다. 찬란함 배후에는 파멸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장기적인 미래가 전혀 없고 조작뿐이며 어떤 의미도 아침 안개와 같다.

의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오는 세상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도래하고 현재화되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말미암아 영원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 속에 존재하며 말세의 심판도 이제 시간 안에서 규명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말세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다. 장래에 올 것이라 했던 부활도 지금 새 창조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이다. 비얼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히 영적으로 새 우주의 시작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새 우주의 시작인데, 예수님이 물질적으로 부활되셨고 새롭게 창조된 육체로 부활되셨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죽음과 성령을 통한 부활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마지막 때에 새 창조를 일으켰다.

이 시대가 이미지를 강조해도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말을 사용하여 우리 사상을 표현하여야 한다. 그 사상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하신 실재와 일치해야 한다. 이런 사실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한 세계에서 운명, 공백,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해 중심을 차지하지만 실제로 그런 교환은 타락한 마음에 존재할 뿐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감춰져 계신 것이지 대체되신 것이 아니다. 타락한 삶 속에서 죄인은 이 세상의 일부가 된다. 이런 세상은 아무런 미래가 없고 모순으로 뒤엉킨 인간 의식의 심연에는 절망의 암시가 된다. 우리는 의미를 위해 만들어졌어도 공허함만 발견하고, 윤리적인 존재로 만들어졌지만 거룩한 것에 멀어져 있으며, 지식을 위해 만들어졌어도 알고자 하는 너무나 많은 요청 속에서 방해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실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순은 오직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오는 세상이 없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세계는 모든 즐거움과 안락에도 불구하고 소멸되는 중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휘장이 그 위에 드리워지고 있으며, 새로운 질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했는데 오직 이 질서 속에서 의미와 소망과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적인 기독교가 목표하는 것은 개인의 영성이 아니라 진리이다. 성스러운 것에 접근하는 수단은 자아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초대교회는 안락한 교외 클럽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오는 고통스런 요구와 관계있다. 초대 교회가 몰두한 것은 세계가 혼란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시공간에서 하신 일이지, 다양한 프로그램과 현란한 조명과 멋진 연출이 아니다. 영상과 공연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포야말로 교회가 말하는 진리의 핵심이다.(웰스의 '위대하신 그리스도' 5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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